짬짜미 독시(詩)
도서명 | 쓰러진 자의 꿈 | ||
지은이 | 신경림 | 출판사 | 창작과비평사 |
제목 : 길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좆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제목 : 내가 사는 나라는
내가 사는 나라는 너무 넓어서
쌀수입개방 반대 전단을 뿌리는 젊은이들
그 앞에 맥도날드 가게가 줄지어 섰고
그 안의 공원은 더욱 넓어서
무료급식소에서 점심을 때운 늙은이들
소말리아의 굶어 죽는 아이들과
크로아티아의 전쟁 얘기에 침방울을 튀기면
한쌍의 젊은이 대낮의 사랑에 더욱 취하고
가난은 부끄러운 것 가난은 부도덕한 것
서로 야윈 손바닥을 뒤집어 보이면
배고픔도 헐벗음도 없어진 지 오래여서
누더기는 달콤한 현수막으로 가려지고
신음은 화려한 노래에 묻히면서
내가 사는 나라는 하늘도 가없이 넓어서
멀리서 가까이서 눈송이가 날리며
침과 거짓을 한꺼번에 덮어버리고
얼룩덜룩 서투른 분칠로 묻어버리고
제목: 나목 (裸木)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 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도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눈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 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제목 : 진드기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드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먹고 자고 뒹구는 이 자리가
몸까지 뼛속까지 썩고 병들게 하는
시궁창인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짐짓 따스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 자리가
암캐의 겨드랑이나 돼지의
사타구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음습한 그곳에 끼고 박힌 진드기처럼
털과 살갗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길들여져
우리는 그날 그날을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큼한 냄새와 떫은 맛에 취해
너무 편하게 살려고만 드는 것은 아닌가
암캐나 돼지가 타 죽는 날
활활 타는 큰 불길 속에 던져져
함께 타죽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서.
제목 : 토성 (土城)
잔돈품 싸고 형제들과 의도 상하고
하찮은 일로 동무들과 밤새 시비도 하고
별것 아닌 일에 불끈 주먹도 쥐고
푸른 달빛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면서
바람도 맞고 눈비에도 시달리는 사이
햇살에 바래고 이슬에 씻기는 사이
턱없이 뜬금없이 꿈에 부풀기도 하고
또 더러는 철없이 설치기도 했지만
저도 모르게 조금씩 망가지고 허물어져
이제 허망하게 작아지고 낮아진 토성
지천으로 핀 쑥부쟁이꽃도
늦서리에 허옇게 빛이 바랬다
큰 슬픔 큰 아픔 큰 몸부림이 없는데도
번듯한 나무 잘난 꽃들은 다들 정원에 들어가 서고
억센 풀과 자잘한 꽃마리만 깔린 담장 밖 돌밭
구멍가게에서 소주병 들고 와 앉아보니 이곳이
내가 서른에 더 몇해 빠대고 다닌 바로 그곳이다.
허망할 것 없어 서러울 것은 더욱 없어
땀에 젖은 양말 벗어 널고 윗도리 베고 누우니
보이누나 하늘에 허옇게 버려진 빛 바랜 별들이
희미하게 들판에 찍힌 우리들 어지러운 발자국 너머
가죽나무에 엉기는 새소리 어찌 콧노래로 받으랴
굽은 나무 시든 꽃들만 깔린 담장 밖 돌밭에서
어느새 나도 버려진 별과 꿈에 섞여 누워 있는데.
제목 : 봄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
잔을 들면 소주보다 먼저
벚꽃들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
벚꽃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샅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제목 : 난쟁이패랭이꽃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때리고
닥치는 대로 팔다리를 꺾는 바람을 피하느라
뼛속 깊은 곳까지 후벼파는 추위를 견디느라
이토록 작아지고 뒤틀린 우리들의 몸통을
말하지 말자 아름답다고
메마른 돌밭에 뿌리박기 위하여
천길 벼랑에나마 매달려 살기 위하여
보아라 굽었지만 더욱 억세어진 이 팔다리를
햇빛을 향하여 꼿꼿이 들려진
이 짧지만 굵은 목덜미를
말하지 말자 눈물겹다고도
아픔과 눈물을 보랏빛 꽃으로 피울줄 아는
눈비 속에서 얻은 우리들의 슬기를
서로 받고 준 상처를
안개에 섞어 몸에 두리기도 하는
악다구니 속에서 배운 우리들의 웃음을
우리들의 울음을
* 난장이패랭이꽃은 백두산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늦여름에 줄기 끝에
엷은 보랏빛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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