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정말 그럴까? - 세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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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책소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정말 그럴까? - 세이노

 



 
                                     짬짜미 독서

도서명
세이노의 가르침
지은이
세이노
출판사
데이원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정말 그럴까?

 

노오력은 정말 개소리일까? 중산층 이하가정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부잣집 자녀들과

비교하면 그럴수 있다.

가난한 자녀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잠깐만! 어느 시대이건 빈민층, 서민층, 부유층은

동시에 존재하여 왔다.

 

내가 이얘기하고 싶은 것은 70년대말 가난하였던 내가 겪었던 절망감이며 실업률이니 취업률이니 그런것과

상관없이 언제나 절망의 골짜기는 있어 왔으나, 그 골짜기에서 빠져나온 사람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유독 작금의 MZ 세대에게서는 ‘이생망’이 두드러지게 나타날까?

 

첫째, SNS 때문이다. 돈자랑 하는 연놈들이 하나둘이 아니다보면 그들을 자기자신과 비교하면서

생기는 박탈감의 크기가 과거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증대되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휴대폰을 만지작 거린다. 이 멍청한 연놈들아!

 

둘째 그 우라질 놈의 워라밸 때문이다. 아무리 근로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시켜 놓으면 뭐하나 그 8시간밖에 시간을 자기에게 재미있는 것들을 하는 데에만 사용하는데 무슨 변화가 생기겠는가

셋째 잘못된 부동산 정책 때문에 두 다리 쭉 뻗고 편하게 누울 만한 공간을 미래에 소유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내가 주는 보수로 알뜰살뜰 집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데 어려워질수록 결국 직원들은

우울해질것이고 일하는게 재미가 없다.

부동산은 코스톨라니가 말하듯이 사이클을 탄다.

상승기가 있으면 하강기가 있다. 10년주기설도 있지 않은가

이미 2022년 하반기부터 부동산 시장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또한 주거공간에 대해 남들과 비교하지 말아라. 20대 중반에 나는 약수동 언덕 위로 한참 올라가야 하는 개인주택의 차고를 월세 몇만원에 빌려서 약 4년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그 4년동안 내가 이생망을 얘기하고 있었을까? 나는 내 몸을 편히 누일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잇는 공간이라면 아무리

교통이 불편하고 작고 허름하여도 행복해하였다. 처지에 맞는 공간을 찾아라.

지금 그렇게 살기 싫다고? 그렇다면 평생 그 모양 그꼴로 계속 살아라.“

물은 주인집 화장실을 이용할때마다 받아왔다. 전기는 주인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정원등에서 시디관을 이용해 전선을 끌어들여 콘센트를 연결했는데 처음해본 작업이었다. 취사도구는 전기곤로였다. 설거지 물은 외부로 흘려 내보내야 했다.

어느날 곤로 위에 후라이팬을 올려놓고 뭔가 볶은 후 종이로 덮었는데 다음날 먹으려고 살펴보니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쥐가 놀고 있었다.

 

차고에서 4년째 살고 있을 때 한번은 동태찌개가 먹고 싶어서 약수시장에서 동태를 사왔다. 뚜껑이 밀폐되는

스테인리스 김치통에 찌개재료와 동태를 함께 넣고 곤로 위에 올려놓은 후 번역에 몰두하던 중 1-2 시간이상 지났을때쯤이었다.

김치통을 바닥에 놓고 밀폐장치 3개중 2개를 풀었을 때 내부 압력 때문에 펑하면서 뚜껑이 날아가더니 뜨거운 동태찌개 국물이 내 얼굴은 물론이고 차고 내부 전체에 뿌려졌다.

그때 그동안 살면서 억누르고 있던 눈물이 저절로 계속 쏟아졌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만 울어라고 위로 했다.

시간이 지난뒤 나의 아내를 만났을 때 내가 아내에게 사준 첫 음식은 바로 양은냄비에 끓인 동태찌개였다.

 

차고에 살던 내가 스스로를 이끌어 지금에 이르렀듯이 크고 작은 삶의 변화를 이뤄냈다는 독자들의 연락이 종종 온다.

카드빚을 갚고자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보상의 수레바귀는 천천히 돈다” 는 말을 되뇌며

일하여 인력사무소 지명도 1순위에 올랐다던 독자가 떠오른다.

약 15년 후인 현재 그는 연매출 7-8백억원대, 영업이익 수십억 원대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나의 생각

 

세이노님의 글을 보니까 나도 생각이 나는 것이 있다.

지금은 작은 상가주택을 하나 가지고 있고, 그곳에서 월세를 받고 있다.. 이렇게 하기까지 쉽지는 않았다.

우리가 처음 신혼을 방한칸에 시작했다. 나는 결혼을 해서 이곳 부산까지 왔다.

남편이 부산분이라 나도 부산에 올 수밖에 없었다.

많이 힘들었다. 외롭고 내가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아이들도 시골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움. 외로움 ..안타까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그나마 돈을 모을수 있었던 것은 ..방 한 칸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들 장가갈 때 전세를 주느냐 집을 사주느냐 했을때도

시부모님은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어찌 그리 무심한지 ..

지금은 당당하게 말한다.

안 받는게 더 낳다고 ..그러니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 봐준 고마움 때문에 ..욕은 하지 않는다.

물론 양육비도 주고 그뒤에 매달 30만원씩 용돈도 드렸다.

내 같으면 그런돈을 어찌 받는지

돌아가실 때..내가 준 용돈만큼은 다시 주신 것 같다.

그런 부모도 생각보다는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구나 다 가슴 아픈 말못 할사연이 있다.

다행이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내가 든든한 직장이 있었고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고맙게도..sky는 안 갔지만 부산에서 알아주는 학교에 가서

한명은 대학교에 다니고 한명은 비정규직으로 ..우선 알바를 하고 있다

10월쯤 일본에 갈 것이다. 그곳에서 가서 자기의 꿈을 찾았음은 한다.

나도 열심히 살 것이다.